https://www.youtube.com/watch?v=dhxfGiqA9AA

노란 꽃을 달고 해사하게 노래하는 영상 속 모습을 보고 묵묵히 나를 지탱해온 사랑이 일렁였다.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해본 적도 없고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는 타인의 행복이 나 자신의 행복보다 더 짙게 느껴졌던 날들, 때로는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열병처럼 끓던 그런 사랑은 지나간 것이라 여겼는데. 아주 오랜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다. 아니, 이제야 꿈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더 맞을까. 다시 이 꿈의 세계로 돌아오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을 단순히 ‘휴덕’이라고 칭하기 꺼려지는 마음을 계속 곱씹다가, 말로 풀어내본다.

오빠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될까 봐 무서웠던 때가 있었다. 그 사랑을 딛고 성장해왔는데, 이걸 잃어버리면 내 발밑에 뭐가 남아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좋아하던 가수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정말로 뭔가 큰일이 나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도 그럭저럭 살았겠지만, 다시 디딜 곳을 찾아 멀쩡히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기까지 아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 고된 과정을 차마 겪을 자신이 없다 못 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언제나 머리로, 마음으로 꽉 붙잡고 살던 것이 손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내가 혼비백산했던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정말 따분할 정도로 현실적인 일들이 결국 나를 꿈의 세계 밖으로 서서히 밀어냈다.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 해야만 하는 그렇고 그런 것들. 너무나 당연하게 발 붙이고 살고 있었던 세계의 중력보다 현실의 중력이 강해져서, 무중력 상태에, 그다음엔 새로운 행성에 적응해야 하는 우주인처럼 현기증이 났다. 그런데 그 감각마저도 허탈할 정도로 금세 가셨다. 여전히 공연을 하면 보러 갔고, 노래가 나오면 들었고, 좋아하는 가수가 있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김준수라고 답했고, 무엇보다 오빠는 늘 나를 이루는 본질적인 조각 중 하나였지만, ‘덕질’을 하는 건 아닌 모호한 상태로 시간을 꽤 오래 보냈다. 사랑하지만, 매분 매초 일거수일투족을 찾아보지는 않는 그런 상태.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사랑의 형태가 달라진 것이라고 인정해야만 했다. 거세게 타오르지는 않아도 항상 뭉근하게 온기와 빛을 내뿜고 있는 내 안의 화롯불. 내 자신에게 조금 서운했고, 오빠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어쩌겠느냐고.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내 주변 상황도, 나도 변한 거 아니겠느냐고.

그렇게 잔잔하던 마음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 든 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공연을 보거나 계절이 바뀌거나 마음이 힘들거나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생각이 나서 찾기 시작하면 며칠, 몇 주씩 다시 모든 노래를 돌려 듣고 예전 영상과 그사이에 놓친 영상들을 몰아 봤고, 그러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잦아들곤 했었다. 나에겐 그게 이제 ‘원래’의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믿었고, 몇 달만에 찾아온 활활 타오르는 애정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게 작년 10월의 일이고 이 글은 올해 1월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 또 한 번 전환을 맞았다는 것을, 한 시기의 마침표라고 생각하고 찍었던 것이 사실은 쉼표였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쉼표 뒤의 첫 문장이 될 이 글을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위버스 콘서트 딱 일주일 전에.

아마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이제는 한다. 내가 나아갈 방향을 잡기까지 헤맬 시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할 시간, 나를 돌볼 시간. 일종의 독립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많은 것들을 오빠를 통해 접하고 배웠지만, 나는 오빠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고 오빠의 삶을 통해 보았던 것들 중 내 삶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언제부턴가 깨닫기 시작했었다. 내 갈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아주 오랫동안 기대어 살고 있던 지지대를 잠깐 놓아야만 했고. 그러니까 그 탐색과 실패와 도전과 성취와 적응의 시간 동안 거리가 벌어진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미약하지만 발붙일 곳을 마련했다는 생각이 들 때쯤, 돌아올 수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이 꿈속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말 많이 울었다. 오빠 노래를 들어도, 인터뷰를 읽어도, 토크 영상을 봐도 속절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열병을 처음부터 다시 앓는 것처럼. 어느새 낯설어진 그 온도, 펄펄 끓는 온도에 적응하느라 그랬던 걸까 싶었지만 사실은 그 온도를 절절이 실감한 게 처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더 많은 것들을 겪고 조금이나마 시야가 더 넓어진 다음에야 정말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오빠가 했던 일들과 말들이 얼마나 쉽지 않았을지, 얼마나 큰 마음으로 했던 것이었는지.

얼마 전 우연히 2009년 GQ 인터뷰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어젠 당신의 팬페이지에 갔었다. 거긴 일종의 낙원이었다. 그들은 시아준수 안에서 평화와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것도 진심으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된 느낌은 어떤가? 좋은 노래, 좋은 무대. 보답할 건 그것밖에 없다.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거다. 그런 건 생각하기 어렵다. 난 가수니까, 노래와 무대다.

그리고 그 후로 14년.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달려온 오빠 덕분에, 돌아온 울타리 안은 믿을 수 없게도, 전보다도 더 따뜻하고 행복한 낙원이었다. 더 잘할 수도 없을 것 같았는데 정말로 더 잘해버리고는, 내가 더 잘하겠다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더니 노래와 무대에 더해 더 많은 걸 주려고 애쓰는 내 가수. 어떻게 다시 뛰어들지 않을 수 있었겠어. 내가 헤매는 동안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어주었던 오빠에게 내 온 마음을 담아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전역 후에 한 콘서트에서 오빠가 그랬었지, 이제 어디 갈 일 없으니까 우리 앞으로 계속 만나자고. 요즘 비슷한 얘기를 내가 오빠한테 하고 싶다. 나도 이제 어디 갈 일 없으니까 계속 만나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 또 잠깐은 억지로 밀려나는 때가 올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확실히 안다. 혹여나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결국 돌아오게 될 것임을. 그러니 정말로 우리 느긋하게, 오래오래,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함께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