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춤, Loving You Keeps Me Alive, Life After Life, 게임의 시작 같은 곡들은 현장에서도 영상으로도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이제는 아는 맛을 즐기는 느낌으로 듣게 되기 마련인데 바라콘에서 이 곡들을 새로이 만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아마 내 귀에 익은 것만큼이나, 사실은 그 이상으로 오빠의 몸에도 익었을 곡들일 텐데 같은 멜로디 위에 얹힌 가사의 언어가 바뀐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니. 발음이 달라지면서 소리가 달리 나는 것이나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박자를 늘이고 당기는 걸 듣는 것도 물론 즐거웠지만,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듯 일본어로 노래하는 샤톧, 샤큘, 샤엘은 내가 잘 아는 그들이 아닌 그들의 쌍둥이 형제 같았다.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보고 있다 보면 목소리도, 몸가짐도, 성격도 다른 이들. 단순한 단어나 어절 외에는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음에도 느껴지는 이 미묘한 차이가 너무 재밌고 신기해서,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냐고, 아직도 새롭게 보여줄 게 남았냐고 오빠한테 속으로 물으며 웃었다. 바쁜 와중에도 오랜만의 바라콘을 위한 특별한 무대를 주고 싶었던 오빠의 마음은 애틋하고 조금은 쉬엄쉬엄 가도 될 것 같은데 단 한 순간의 안주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끊임없이 새로운 걸 하려는 모습은…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싶을 만큼 너무 시아준수라서.

첫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세트리스트에 약간은 넋이 빠져 있었고, 둘째 날에는 전날 깜짝 놀라서 흘려 보내고 말았던 새로움들을 꽉 붙잡으려고 집중해서 들었는데, 마지막 날은 다시 넋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왜인지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객석을 향해 밀려오는 감정과 에너지가 훨씬 농밀하고 풍부했다. 눈물 나게 좋았다.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급하게 남겼던 메모에 뭐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들여다보니 이렇게만 쓰여 있다. “도대체 그건 뭐였을까?”(이런 소리라도 써놓고 싶었을 만큼 좋았다는 뜻이겠지만...도움이 안 된다😓)

바라콘 얘기를 하면서 어떻게 레이니나잇과 코토바니데키나이 얘기를 안 할 수 있을까.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머쓱한 기분으로 두 달 전 공연 후기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츠카시이한 노래를 준비했다고 했을 땐, 안일하게도 키미가이레바가 아닐까 혼자 그렇게 확신했다. 내 상상력의 길이의 한계는 고작 13년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오빠는 늘 그러듯 더 굉장한 걸 준비해왔고…레이니나잇 첫 소절을 듣고는 마스크 위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빠가 오래전 것들을 이렇게 불쑥 들고 나올 때마다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노래가 불러오는 기억들이 있다. 그건 오빠에 대한 기억들이기도 하지만, 그 노래를 들으며 매일을 보냈던 나의 기억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오빠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조심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게 좋다. 그 시간을 오빠가 오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 뒤로 자신의 과거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기 때문에, 오빠를 사랑한 시간과 그 시간과 분리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얽혀 있는 나의 시간까지도 행복의 기억으로 남길 수 있었다. 팬이 된 것이 부끄럽지 않게 하겠다고 오빠는 약속했고 데뷔한 지 20년째가 되는 올해까지 그 약속을 지켜왔다. 그리고 이런 노래를 들고 온 것이다.

공연장으로 가던 길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우산을 쓰는 게 소용이 없을 정도여서 그 궂은 날씨를 헤치고 공연장에 도착했을 즈음엔 상하의 할 것 없이 축축했고 바람을 하도 맞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레이니나잇을 들은 순간 그 고생이 싹 잊히다 못 해 지금 내리는 비가 이 노래를 위한 복선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밖은 정말로 비가 내리는 밤이었고, 나는 오빠가 만든 아늑하고 안전한 공간 안에서 공기 중에 자욱한 다정함과 따스함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우중충하던 잿빛의 하루 위로 비눗방울처럼 반짝이는 막이 하나 씌는 것을 환각 보듯 생생하게 느끼는 진귀한 경험. 오빠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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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니나잇과 코토바니데키나이 두 곡을 연달아 들으며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이미 불렀던 노래를 다르게 부른다는 점이었다. 두 곡 모두 마지막으로 들은 지가 한참 된 시점이었지만 어린 시절 들은 노래들은 잊히지 않는 법이다. 각 무대의 초반부에는 이 노래들을 라이브로 듣고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와중에 앳된 오빠의 모습과 목소리가 마치 영상처럼 지금의 오빠 모습 위로 겹쳐져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서서히 기억이 불러냈던 어리고 쨍한 오빠의 목소리가 옅어졌고, 어른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내 주변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날 그렇게 김준수라는 아티스트 인생의 나이테에 또 하나의 동심원이 새겨지는 것을 목격했다. 묵묵히 매년 새로운 원을 그리는 오빠는 이따금 오래된 안쪽의 작은 원을 가장 바깥쪽에 다시 새겨 넣곤 한다. 그러면 나는 자신만만하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손끝에 익었던 그 선이 완전히 다른 형태와 감촉으로 새롭게 나타난 것에 감격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정하고 담담하고 단단한, 어른스럽고 성숙한, 더 가볍기도 하고 더 묵직하기도 한 2023년의 레이니나잇과 코토바니데키나이를 들은 순간의 감정을 아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올해 초에 라라라라라라라라 하고 아름답게 노래하던 오빠의 목소리를 들었다. 반투명하게 반짝거리던 목소리를 타고 날아들던 희망의 격려를 기억한다. 늘 헉할 정도로 선명하고 강렬하게 멜로디에 실린 말들을 전달하는 사람이면서, 가사 없이도 오빠는 목소리의 온도와 빛깔과 질감만으로 모든 메시지를 밀어 보낸다. 그러니 연초에 들었던 라라라라와는 전혀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라라라 라라라 하고 **노래한다는 곡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도 더 전의 오빠는 곧 죽을 것처럼 이 노래의 도입을 불렀었다. 그 기억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애절함을 받아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귓가에 와 닿은 건 끊어질 듯한 간절함으로 끈적끈적한 소리가 아니라 슬픔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읆조림에 가까웠다. 이어지는 부분들은 오빠의 목소리로는 처음 듣는 것이었고,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 달라서 조금 어리둥절한 상태로 첫날 공연장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는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가사를 찾아보았을 때의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그때껏 이 노래가 사랑이 끝나서 “목숨이 다해가듯이” 부르는 노래인 줄 알았는데, 오빠가 그날 부른 것은 “또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대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고, “기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라라라 라라라 하는 노래였던 것이다. 화내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아픈 과거를 끌어안으며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노래. 슬픔 너머로 삶을 이어가는 노래. 이별의 애수를 간직한 채 여전히 사랑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어른의, 슬프고 애련하고도 기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오빠가 이렇게 노래한다는 것이 먹먹했고 벅찼으며 감동적이었고, 사랑이었다.

떨어지는 핀조명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는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편안하다고 말하는 오빠가, 하나의 브랜드가 된 자기 이름을 걸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콘서트에서, 이십대 초반에 불렀던 노래를 지금 내 눈앞에서 부르고 있다는 것이. 그 파란만장한 시간을 통과하여 성숙해진 나의 가수가 내 어린 시절의 노래를 지금의 모습으로 선물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하여 어린 나를 살게 했던 노래가, 지금의 나를 살게 한다. 2023년 봄에 나는 또다시 알게 되었다.